March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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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19 2019-02-28T10:23:40+00:00

이스라엘 재건(그들이 아직 돌아오고 있기에)

0319 - Top - Chayim Malespin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들을 수용할 건물을 복구하고 있는 하임 말레스핀과 그의 팀

하임 말레스핀의 부모는 히피 중에서도 히피였다.

하임의 어머니 테힐라는 16세에 캐나다의 집에서 학대 받다가 가출해, 헐리우드의 휘황찬 조명 아래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히피 운동은 그 당시 완전 절정에 달했고, 테힐라는 그 한가운데서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하며 자유로운 사랑과 세계 평화라는 “가치”를 포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성공했고 어느 저녁 파티에 참석했다가 시간이 멈추고 흰 옷 입은 분이 군중 사이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분은 테힐라에게 말했다. “네가 걷는 길은 죽음으로 향해. 하지만 나를 따라오면 내가 거룩하게 만들어줄게.” 경악한 테힐라는 즉시 파티장을 나왔고 생활 방식을 바꿨다. 하지만 작곡이라는 자신의 은사를 계속 키워나가, 기타를 들고 자주 거리로 나가 찬양을 부르곤 했다.

하임의 아버지 르우벤은 정통 유대교 가정에서 자라 어린 시절의 상당 부분을 예쉬바 (유대교 학교)에서 공부하며 보냈다. 성경에 대한 랍비들의 설명은 의미가 있었지만 완전한 만족감은 주지 못해, 르우벤은 진리를 찾아 거리로 나섰다. 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인생의 해답과 의미를 찾고 있던 때라 그는 동지들을 만나게 됐다.

어느 날, 르우벤은 거리를 거닐다가 길 모퉁이에서 노래하는 여자를 하나 보게 된다. 그녀의 노래는 흥미로웠고 둘은 친구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 운동이 등장했고 르우벤은 이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예수”가 유대인 예슈아로, 유대인들을 그들의 하나님과 재회시켜 주려고 오셨음을 깨닫게 된다. 르우벤은 만남을 이어가 그녀와 결혼을 한다. 르우벤은 그녀에게 콜라 뚜껑으로 만든 결혼 반지를 끼워줬다. 그러나 새로 시작한 신앙 생활 때문에 유대인 가족들은 르우벤을 버렸다.

급진적인 시대, 르우벤과 테힐라는 히피 생활을 급진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이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것이다. 수년 동안 부부는 유목민처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전적으로 분리된 삶을 살았다. 새로운 곳에 정착할 때마다 르우벤은 그곳의 유대인들을 찾아내 그들의 메시아 예슈아를 전했다. 두 번째 자녀인 하임은 이렇게 커져가는 가정에 태어났다. 세 번째 자녀가 태어났을 때 이들은 양육을 위해 이제 더 영구적인 곳을 찾기로 한다. 한 친구가 아미쉬 공동체에 정착할 것을 추천했다. 아미쉬 사람들은 이들에게 친절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결국 이들은 다른 가족들로부터 떨어져나와 꽤나 보수적이면서도 자동차나 전기 등을 허용하는 공동체를 형성했다. 외부 세계와 접촉을 늘려가면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향한 르우벤의 열정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불탔다.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렘 3:14

0319 - Malespin family - Amish - period

아미쉬 공동체와 함께하던 당시의 말레스핀 가족

하지만 그의 부담은 유대인을 향한 열정만이 아니었다. 유대 민족의 고토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르우벤과 테힐라의 마음에 유대 민족을 하나님과 고토로 회복시켜야 한다는 깨달음이 점점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이들은 하늘의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제 그들 스스로가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도 줄줄이 여섯 자녀와 함께 낯선 땅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족은 하나님께 정말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확증하는 표징을 달라고 기도했다.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700개가 넘는 성경 구절을 통해 유대인들을 그들의 땅에 회복시키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영혼에 가득 채웠다.

어느 밤, 지역 커뮤니티 센터에 갔다가 긴 백발의 수염과 머리털의 어떤 남자가 예배하러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말했다. “내 이름은 제불룬이오. 나는 이 마을을 그냥 지나가는데, 하나님께 유업으로 받은 그 땅으로 알리야 해야 할 표징을 구한 가족이 있다는 걸 알게 됐소. 내가 표징을 가져왔소.”

그는 르우벤에게 걸어오더니 단단한 금전 주머니를 건네줬다.

그때 말레스핀 가족은 지금껏 읽으며 기도해온 이사야 49장 22절 말씀을 이해하게 됐다.

주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뭇 나라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치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이 표징은 그들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확증해줬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이 그들을 보내주리라는 성경의 성취였다.

즉시 말레스핀 가족은 모든 것을 팔고 8장의 이스라엘행 편도 항공권을 샀다.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 낙원으로

때로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며 그것은 돌파가 된다. 그리고 때로는 돌파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 동안 버틸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자 기적을 행하신다.

말레스핀 가족은 도착하고 어려움을 겪었다. 돈으로 먹고 입을 순 있었지만, 행정 절차와 문화, 언어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 땅엔 가까운 친척도 없었고, 그들을 위한 적응 프로그램도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부르셨고, 그러므로 모든 문이 닫힐 때마다 다른 문이 열리기를 구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하임과 그의 형 에프라임, 동생 모셰가 군입대할 나이가 되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이들을 통한 돌파가 일어나게 된다.

강력한 노동 윤리, 고토를 향한 열정 그리고 얼굴을 떠나지 않는 미소로 하임은 즉시 이스라엘의 정예군 “야할롬 (다이아몬드)”으로 차출되었다. 형제들은 3년 동안 복무했고, 지금도 예비군에 소속되어 있다.

0319 - Malespin family in Israel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지고 군복무 중인 아들을 방문한 말레스핀 가족

다른 사람들은?

제대 이후, 하임은 텔아비브에서 자신 밑에 건축 팀 하나를 통째로 둔 성공적인 목수가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하임은 이제 다시는 영어를 쓸 필요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하임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에 도착해 말레스핀 가족처럼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지를 알게 됐다.

말레스핀 가족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많은 구절을 읽으며 보낸 시간들은 하임에게 알리야의 중요성을 확고하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알리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체들만 있었다. 이 사람들 중 엄청나게 많은 비율이 1~2년 내로 다시 이스라엘을 떠나는데, 도착 이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어느 날 텔아비브에서 하임은 한 예배 센터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30년 동안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을 돕고 있다고 하는 한 자매를 만났다. 하임이 이스라엘에 도착한 유대인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나누자, 그녀의 아버지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임은 갈릴리 지역으로 옮겼고 자신의 꿈을 세워가기 시작하며, 그 자매도 지켜갔다. 둘은 결혼을 했고 이제 두 자녀를 두었다.

하임은 갈릴리 호숫가 주변에 버려진 기숙 학교 캠퍼스를 발견했고, 각 건물을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들을 위한 임시 숙소로 변모시킬 야망찬 프로젝트를 허가 받았다. 자원 봉사자들은 전세계에서 왔고, 하임이 최소 비용과 그의 10배에 달하는 열심으로 건물을 복구하는 일을 도왔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렘 32:41

0319 - Aliya Return Center volunteers

함께 지역 공원을 청소한 뒤 전세계에서 온 봉사자들과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들

 

0319 - Chaim and family

디애나, 하임과 두 자녀

이민자들을 데려오는 것만으론 안 된다

우리 부모님 (아리&쉬라)이 마오즈 이스라엘에서 첫 번째 노력을 기울인 부분은 1976년에 사람들의 정착을 돕는 것이었다. 우리는 공동체로 개척할 만큼 큰 규모의 집을 지어, 이민 절차 중에 있는 유대인들이 머물게 했다. 우리 집에는 자립하기까지 항상 1주일, 1개월, 심지어 1년 단위로 머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더 빨리 움직이고 있고, 숫자도 커졌다. 수백 명의 이민자들이 하임의 일을 통해 도움을 받았고, 더 많은 이들이 도움 받을 예정이다. 이민법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언어와 문화는 복잡하고, 생활비는 기겁할 정도로 세다. 본국에서 큰 돈을 벌던 기술자나 기업가들이 학교 경비나 계산원으로 일하는 것을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숙련된 일꾼들이 이 문화 가운데 적절히 흡수되어야 그들의 부요한 지식이 새로운 환경으로 이전될 수 있다.

0319 - Israeli Passport and ID

알리야 프로세스를 마치고 공식 이스라엘 시민권을 받게 되는 기쁨

 

0319 - Shabbat Dinner at RAC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들과 함께 센터에서 먹는 샤밭 만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이 땅에 다시 모으고 계시며, 하임은 이들과 함께 걸으며 집을 구하고, 사업을 시작하고 히브리어를 배우는 등 모든 걸음에 도움을 주고자 문앞에 서 있다.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보내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가족들이 이스라엘에 정착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이 다시 흩어졌던 그 땅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꿈을 잃어버리고 또 하나의 세대가 귀환에 대한 부르심을 성취하고자 시도하기도 전에 지나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의 귀환을 위한 길을 닦도록 우리를 이스라엘로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열방이 참여하도록 부르신다.

이사야 57장 14절에서 말씀하신다.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0319 - Aliya Return Center restoring a building

알리야 수속을 하는 새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매입한 땅에 건물들을 복구하는 중

이방들이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렘 31:10

0319 - Aliyah Return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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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히브리어의 아버지: 6부엘리에제르 벤 예후다의 운명: 2보 전진 1보 후퇴

0319 - First Committee for Hebrew Language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는 신생 현대 히브리어를 관장할 위원회의 필요를 내다보았다. 1900년대초에 만들어진 제한된 어휘에 수천 개의 단어들이 계속해서 더해질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위원회는 올바른 발음을 결정해야 했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몇 천 명의 유대인들은 다 다른 나라에서 왔고 억양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었다. 벤 예후다는 1912년 “히브리어 위원회”를 창성했고, 이는 1953년에 히브리어 학회가 됐으며 현재는 히브리어의 최고 학술 기구이다.

현대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하는 테오도르 헤르츨이 1904년에 죽었을 때,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는 깊은 애통에 빠졌다. 헤르츨이 시온주의라는 세계에 등장하기도 전에 벤 예후다가 25년에 가깝도록 유대 국가를 꿈꾸고 그를 위해 일했지만, 헤르츨이 그의 리더였다. 유대 민족을 다시 고토로 데려갈 사람이었다.

그렇다. 1878년, 엘리에제르는 디아스포라의 유대 민족에게 집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불타는 질문”이라는 자신의 첫 번째 열정적 호소문을 썼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흩어져있었을 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한 민족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들은 수많은 언어와 방언을 썼으며, 전세계에 흩어져 있었고 많은 19세기 유대인 지도자들은 모든 유대인들이 어느 곳에 살든 무조건 동화될 것을 강력히 주창했다. 더 큰 핍박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1896년 전세계에 울려퍼진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 것은 헤르츨이었다. 그는 자기 민족의 멸종을 막기 위한 해법은 조상들의 고토로 돌아가는 것 외엔 없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헤르츨 조차도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데에 촉매로서 히브리어를 부활시키려는 벤 예후다의 불타는 열정은 웃어넘겼다. 헤르츨에게 있어 사어를 부활시키는 것은 자신이 보는 가능성의 범주를 많이 벗어나 있었고, 그는 새로운 유대 국가를 위한 최선의 언어는 독어라고 확신했다.

헤르츨의 죽음을 회고하면서, 엘리에제르는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게 됐다. 그는 마지막 25년 동안 자신이 성취한 바가 너무나 적음을 깨달았다. 자신과 두 번째 부인, 11명 중 여섯 자녀가 살아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스라엘 온 땅에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은 수백 명 밖에 안 됐다.

자신의 실패를 깨닫다

엘리에제르는 모든 희망을 잃었다. 아내 헴다는 그가 히브리어 사전 첫 권의 원고 전체를 태워버리려고 준비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아내는 소리치며 성냥갑을 던져버렸다.

오늘날 같으면 이것을 신경쇠약이라 부를 것이다. 그는 헴다에게 말했다. “내가 히브리어를 부활시키려고 시도한 것이 실수였음을 이제 알겠소. 실수가 아니었다면 반대가 이렇게 크진 않았을 거요.” 그는 죽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에 최초의 히브리어 사전을 만들어 당신이 남길 위대한 유산은 어쩌고요? 이스라엘로 오고 나서 당신이 해온 일들은 어쩌고요?” 헴다가 소리쳤다.

“내가 내 민족을 섬길 수 없다면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소?” 그는 대답했다. “그들이 섬김 받기를 거부하잖소! 아무도 원하지 않으면 히브리어가 무슨 소용이오? 사전이 무슨 소용이오? 누가 쓰겠냔 말이오?”

자신의 민족을 연합시키기 위해 히브리어가 존재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다는 실망감 뿐 아니라, 벤 예후다 가족은 커다란 빚더미에 앉아 빚쟁이들을 마주할 방법이 없어보였다.

순회에 나선 헴다

이 대화를 하고 난 헴다는 유럽에 가서 벤 예후다 사전 1권의 출판을 위한 후원자들을 찾기로 한다. 그녀에겐 돈이 거의 없었고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가 구어가 되도록 만드는 것에 대한 관심은 극소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탁월했다. 먼저 헴다는 부다페스트에 가서, 엘리에제르가 서신을 주고 받았던 유명한 동양학자를 만났다.

그 교수와 세 명의 동료 학자들은 1주일 동안 원고를 살펴보았다. 그들의 결정은? “벤 예후다는 언어라는 과학에 있어 당대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었군요.” 이제 헴다는 아무도 고려하지 않은 관점을 갖게 됐다. 과학적 가치였다.

그러한 추천을 받아 헴다는 베를린에서 저명한 랑건샤이체 페르락스부한들룽과 약속을 잡았다. 사전 출판에 특화되어 오래 일해온 회사였다. 이 저명 출판사는 벤 예후다가 식자를 제공한다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이 저명하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히브리어 식자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헴다는 출판을 위한 자금을 일으켜야 했다. 그녀는 유럽을 누비며, 부유한 유대인 교수와 사업가들의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30대의 매력적인 숙녀였다. 게다가 확신과 결단에 차 있었다. 네 달 반이 지나고, 헴다는 약 2천 달러를 모으는 데에 성공했다. 1권 출판에는 충분했다.

새로워진 열정

헴다의 성공을 전보로 받고서, 벤 예후다는 답장을 이렇게 보냈다. “이게 현실이오, 아니면 아직 깨지 않은 꿈을 꾸고 있는 거요?” 50번째 생일에 벤 예후다는 사전의 1권을 식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영혼에 새로운 불을 지펴 일하기 시작했다.

새로 한 권이 준비될 때마다, 유럽을 누비며 자금을 조달하고 탐색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 되었다. 헴다는 한 번에 수개월씩 시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겨놓고 떠났다. 때로 그녀는 혼자 여행했다. 때로는 엘리에제르와 같이 갔는데, 헴다가 후원자를 물색하는 동안 그는 가장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먼지 쌓인 책들 가운데 히브리어의 뿌리를 더 찾는 일을 했다. 진실로 그녀는 여자 홀로 자급하면서 자금을 구하는 일에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 가운데 주어진 역할임을 받아들였다.

아주 천천히, 이스라엘 중부의 몇몇 정착촌에서 지역 학교 수업 가운데 히브리어를 진심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커다란 만족감에 벤 예후다는 많은 선구적 가족들이 고통을 감수하며 자녀들을 히브리어로 훈련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들은 자녀를 유럽의 대학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당연히 팔레스타인의 몇 안 되는 젊은 원어민들은 돌아오질 않았다.

벤 찌온이 유럽 대학으로 가다

벤 예후다는 자신의 첫째 아들의 기회를 붙잡아, 그를 유럽 대학에 보냈다. “최초의 히브리어 구사자”가 그 언어와 이스라엘 땅에 너무나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돌아왔다. 완전히 숙달된 언론인으로 25세에 돌아온 그는 벤 예후다의 신문사를 이어 받아, <더 라이트>라는 일간지로 발전시켰다. 언론과 사전은 벤 예후다가 18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히브리어를 일으키는 데에 가장 탄력을 준 사업이었다.

0319 - Itamar Ben Avi

엘리에제르와 첫 아내가 낳은 첫 아들 벤 찌온은 “최초의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쓰는 아이”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언론인이자 여러 히브리어 신문의 소유주로 알려지게 됐다. 결국 그는 이름을 이타마르 벤 아비로 바꿨다.

기류의 변화

상술했듯이 테오도르 헤르츨은 1904년에 죽었는데, 히브리어에 관심이 없었고 이는 벤 예후다에게 큰 슬픔이었다. 그러나 7년 후, 세계 시온주의 의회의 새로운 의장으로 다름 아닌 오토 바르부르크가 뽑혔다. 그는 벤 예후다가 히브리어 사전 3권을 출판할 수 있도록 재정을 대준, 아주 부유하고 탁월한 학자였다!

둘째로 1908년, 청년 터키당 혁명은 팔레스타인에서 시온주의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새로운 발언의 자유와 함께 히브리어 신문이 사방에서 등장했고, 벤 찌온은 낙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벤 예후다는 아들에게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말하고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든 진보적 걸음은 유대 사회에 절대로 유익한 것이라고 말했다.

벤 예후다는 질투의 DNA를 갖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의 천재성 가운데 가장 놀라운 특징이다. 어떤 유대인이라도 유대 국가를 만드는 일을 향해 문화적, 경제적 진척을 어떻게든 이뤄내고자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엘리에제르는 온 존재로 지지하고, 열정적으로 지원했다.

예루살렘에 예술이 이르다

어느 날, 불가리아 출신의 매력적인 청년 보리스 샤츠가 벤 예후다의 집에 나타났다. 샤츠는 조각가였다. 그와 친구 에프라임 릴리엔은 예루살렘에 예술 공예 학교를 열고자 했다. 이들은 유대/중동의 고전적 스타일과 유럽의 전통을 섞은 민족적 형태를 만들기를 꿈꿨다. 유대 예술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유럽에서 온 10명의 열정적 유대인 청년들을 함께 데려왔다. 이들 (과 한 여성)이 도착하기까지, 예루살렘 (내지 이스라엘 전역)에는 예술이라는 것이 없었다.

보리스는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가 제대로 섞이지 못한 형태로 자신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벤 예후다는 여섯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그 프로젝트를 함께 의논했다. 벤 예후다는 전적으로 협조하기로 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학교에서 모든 수업을 히브리어로 하라는 것이었다! 샤츠는 충격을 받고, 자신들 중 누구도 히브리어를 한 단어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벤 예후다는 샤츠를 집으로 데려왔고, 6개월 동안 가히 그를 집안에 가둬두고 그와 그의 예술가 친구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10명의 학생들은 유대 학교에 머물게 됐다. 여름 방학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닥에서 잤고, 교사가 배정되어 공동 주방에서 음식을 해주며 히브리어 수업을 진행했다. 헴다는 이 예술 학교 최초의 비서가 되었다.

0319 - Boris Schatz, founder of Bezalel

초기 선구자이자 조각가인 보리스 샤츠는 1906년 후에 세계적으로 저명한 베짤렐 예술-디자인 학교가 되는 것을 설립했다. 샤츠는 모세의 회막을 디자인했던 브살렐을 따라 베짤렐이라고 이름붙였다. 

초정통파는 그러한 우상 숭배가 쳐들어온 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이 낙심했다. 반면에 예루살렘 여성들은 그림이나 바느질 작품을 사서 집안의 텅빈 벽들에 걸기 시작했다. 현재 베짤렐 예술-디자인 학원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관이다.

벤 예후다는 젊은 유대 이민자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구하고, 히브리어 수업을 들으며 새로운 직업을 마련해 농부가 되거나 소규모 창업을 하도록 도왔다. 그 무엇보다 그는 히브리어를 배울 것을 요구했다! 곧 이 열정어린 젊은이들 다수가 새로운 정착촌으로 들어가 새로운 학교에서 자녀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게 됐다.

언어 전쟁

히브리어의 존재감이 천천히 커지면서, 어느 언어-독어와 히브리어-가 팔레스타인 땅의 유대인들이 쓰는 국어가 될 것인가에 대한 긴장감이 1912년에 무르익었다. 부유한 독일 유대인들이 하이파에 화려한 대학교를 세우려고 하자 격정적인 학자들의 전쟁이 있었다. 조건이 하나 있었다. 모든 과목을 독어로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까지 수천 명의 현지 유대인과 자녀들이 이미 히브리어에 유창해졌고 모든 학교에서 최소 히브리어로 일부 과목을 가르칠 것을 결단했다. 세계 시온주의 회의 대표단은 이제 히브리어에 대한 비전을 붙잡고 엘리에제르가 이스라엘에서 독어 사용에 맞서 자신의 의견을 설파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변호했다. 엘리에제르는 자신의 사전을 계속 출판해 나가려면 부유한 독일 유대인들의 기여가 아직도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스라엘 땅에서 독어가 제1의 언어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전국 학교들의 파업이 터져 학생들은 독어 교과서를 불태우기에 이르렀다. 물론 벤 예후다가 그 싸움의 중심에 서서 피흘림이 있을 것이라 위협했다. 그의 집은 아예 일반 본부가 되었다. 전쟁 협의회가 밤늦도록 열렸다. 마침내 교사들과 학생들은 파업을 하고 거리로 나가 히브리어로 소리쳤다. “독어 사용 반대” “히브리어 살려라”를 외쳤다.

당연히 독일인들은 벤 예후다가 만든 사전의 출판을 중단할 것을 위협해 왔다. 그러나 벤 예후다를 막을 자는 없었다. 그는 전국에서 모든 수업을 히브리어로 하는 “응급” 학교를 열 것을 지시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나무 상자를 의자 삼아 앉았다. 천천히 동요는 가라앉았다. 독일 학교들은 다시 열게 됐지만, 히브리어는 교과정에서 빠지지 않았다. 벤 예후다는 이상하게 기운을 얻어 펜을 들고 사전 작업에 복귀했다. 히브리어의 때였다.

계속되는 빚에서 구출되다

헴다는가 다시 한번 다음 사전 출판을 위해 모금을 하고자 유럽으로 향해야 할 때였다. 엘리에제르도 함께 가기로 했다. 이번에도 그는 각처의 국립 도서관으로 가서 시대를 관통하는 히브리어의 시작과 지속에 대한 새로운 비밀을 알게 해줄 옛 책들에 파묻혔다.

런던을 방문한 후 헴다는 제5권을 출판할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엘리에제르는 옥스포드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들로 인해 완전히 흥분해 있었다. 한 친구는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는 1등선 배표를 주었다. 그런 호화를 누릴 수 있는 생애 첫 기회였다.

엘리에제르의 생애 가운데 평화로운 시기였다. 최소한 향후 2년은 유럽에 가서 굽실거릴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은 이제 엄마가 수개월 동안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는 사실에 탄성을 질렀다. 엘리에제르는 수년 동안 책상 앞에 이런 모토를 써두었다. “하루는 짧고,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이제 이렇게 바꿨다. “내 하루는 길다. 내 일엔 축복이 임했다.”

0319 - Fisrt Bezalel campus

사진은 1913년 최초의 캠퍼스로, 현재 학부 건물 중 하나다.

 

0319 - Bezalel Art Academy

팔레스타인에 닥친 1차 대전

엘리에제르와 헴다는 진짜 휴가를 누리기로 결정했다. 아이들을 페타흐 티크바 정착촌에 보내 친한 친구들과 있도록 두고, 트렁크를 싸서 베이루트로 향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배에 타려고 하이파에 도착했을 때, 도시가 혼란 가운데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독일은 막 프랑스에 대해 전쟁을 선언했고, 잉글랜드는 독일, 오스트리아에 대해 전쟁을 선언했다. 은행들은 문을 닫았다. 부부에겐 겨우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돈이 있을 뿐이었다.

어둠이 성지를 뒤덮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세계 모든 곳들로부터 분리되었다. 배들이 이곳 해안으로 오지 않았다. 설탕, 쌀, 등유를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투르크는 배반죄로 고발할 수 있는 모든 이들, 즉 시온주의 활동가들을 찾고 있었다. 히브리어 언론가로 알려진 부부의 아들 벤 찌온을 체포하고자 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른 아들 에후드는 독일에서 공부하던 중에 연락이 끊겼다. 다시 한번, 벤 예후다는 막 떠오르고 있던 자신의 민족을 위한 국가의 꿈이 멸절될 위협을 받는 듯했다. 그는 사전 연구에 집중을 못하고 있었다. 헴다는 그의 걱정을 크게 염려했다.

다음 달에 계속…

주요 출처:
<예언의 성취,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 (손자)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 저, 2008; <선지자들의 언어,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의 생애> 로버트 세인트 존 저, 1952; https://goo.gl/MVmMUK; https://goo.gl/8r29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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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통령 조찬 기도회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다

0319 - Top - Prayer Breakfast

대통령 조찬 기도회에 초청 받은 이스라엘 대표단. 왼쪽부터 라마트 하샤론에서 온 아리 소르코람, 워싱턴 DC에서 온 테리 앨런, 나바 부케르 크네셋 의원, 필라델피아에서 온 조엘 처노프, 아쉬도드 부시장 엘리 나흐트 박사.

0319 - Ari with Michelle Bachmand and Nava Boker

미셸 바흐만 전 의원, 나바 부케르 크네셋 의원과 아리.

2월에 나는 이스라엘 대표로 미국 의회의 초청을 받아 워싱턴 DC에서 열린 국가 조찬 기도회에 참석하는 영예를 얻었다. 우리와 함께 참석한 이들 가운데에는 나바 부케르 크네셋 의원, 아쉬도드 부시장인 엘리 나흐트 박사가 있었는데, 나흐트 박사는 이스라엘 크네셋에서 수년간 법률 고문으로 있기도 했다.

0319 - Ari with Congressman Steve Watkins

스티브 왓킨스 의원 (캔자스주, 공화당), 아리 소르코람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조찬 기도회는 모든 참석자들에게 아주 긍정적이고 고무적이었다. 연설을 한 모든 이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유대-기독교 윤리 위에 세워진 나라이며, 미국이 가는 길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독교 국가의 것이리라고 분명히 말했다.

우리는 이스라엘-미국 관계, 그리고 중동의 상황을 개선할 방안을 여러 의원들과 논의할 기회가 있었는데, 특히 유대-아랍 사회와 관련하여 그랬다. 나는 또 중국, 남미, 유럽에서 기도회에 참석한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많은 동맹들이 있으며 그들이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굳게 믿고 지지함을 알게 되는 아주 긍정적인 자리였다.

전세계 모든 이스라엘의 친구들에게 축복을 전한다. 그들의 지지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0319 - Israeli delegation with congressman Bill Johnson

이스라엘 지지에 대한 감사 서신을 들고 있는 빌 존슨 의원 (오하이오주, 공화당), 나바 부케르 크네셋 의원, 조엘 처노프, 아리 소르코람, 엘리 나흐트

 

0319 - Israeli delegation with Congressman Zeldin

조엘 처노프, 테리 앨런, 나바 부케르 크네셋 의원, 이스라엘 지지에 대한 감사 서신을 들고 있는 리 젤딘 의원 (뉴욕주, 공화당)과 아리 소르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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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사랑하는 마오즈 동역자 분들께,

이 젊은 메시아닉 유대인들의 새로운 세대는 이스라엘에서 정말로 많은 영역에서 영향력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희 사회에는 변호사, 치과 의사, 공인 상담가, 교사, 기업가, 그리고 첨단 기술 산업에 종사하는 많은 메시아닉 신자들이 생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풀타임 사역을 하는 놀라운 젊은 리더들도 굉장한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각계의 이스라엘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죠.

하임 말레스핀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있어 주님께서 보내주신 남다른 종들 중 하나입니다. 하임과 아내 디애나는 직접 이민을 겪은 이들로서 새로운 나라, 새로운 언어, 새로운 관습 가운데 친구도 없이 들어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제대로 압니다.

이스라엘 정부와 다른 사설 기구들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민할 수 있도록 끝없이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갓 도착한 이민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단체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들은 진정 말그대로 “잃어버린 영혼들”입니다. 언어를 모르거든요. 공과금처럼 기본적인 것들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거든요. 교육 체계도 모르고요. 도움이 필요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말레스핀 가족이 나선 것입니다!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친절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장 유약하고 취약한 시간 가운데 그들을 돌봐주는 사람은 그들의 삶 가운데 최고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땅에 머무느냐, 아니면 포기하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느냐를 결정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슈아의 사랑이 하임과 디애나, 그들의 놀라운 봉사 팀을 통해 빛납니다. 이들은 이민자들이 새로운 생활에 동화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린 이민자들에게 집을 제공하고 먹여줍니다. 수주 혹은 수개월 동안 그렇게 하면서, 든든한 기반이 생기도록 해주죠.

그들의 손을 잡고 시민권을 받는 과정을 함께 걸어갑니다. 그들에게 어떠한 특별한 혜택들이 주어지는지 알게 해주죠.

히브리어 학교에 등록하거나 은행 계좌를 개설하는 일, 안정적으로 살 곳을 찾는 일, 그리고 창업을 하는 일까지 개인적으로 함께해 줍니다.

하임과 디애나의 목표는 이민자 개인 혹은 가족들이 공동체 안에 심기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을 위해, 하임은 농업 훈련을 해주는 6개월 간의 프로그램도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우리 시대, 우리 목전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는 것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압니다. 벤 예후다와 그 가족이 일생을 바쳐 이 땅과 유대 민족의 언어가 살아나도록 했던 것처럼, 우리에겐 예언의 성취에 참예할 기회가 있습니다. 흩어진 유대 민족을 그들의 고토 이스라엘에 회복시키는 거죠. 주님, 그렇게 해주세요!

시온을 위하여!

아리 & 쉬라 소르코람

추신. 지금은 신나는 때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토에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을 계시하실 것임을 알고 있죠.   여러분의 베풂과 기도로 오늘, 하나님의 회복에 참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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