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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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19 2019-07-08T06:48:20+00:00

중대 발표!

0719 - Ferguson Family - cover

코비와 샤니,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그들의 다섯 자녀-일리트, 라하브, 네바에, 셀라, 네셰르

 

나는 1970년대 후반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자랐다. 미국에서 이민 온 유대인 부모의 자녀다. 그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1세대 유대인들로 2천년 만에 예슈아를 믿는 신자로 양육되었다. 아마 불과 수십 명이었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미국에서 당시 성공적인 삶을 살고 계셨다. 대학 학위들과 법 집행, 군복무, 체육 분야의 다양한 성취를 이루셨는데, 그 가운데에는 NFL 선수 생활과 연기 및 촬영 경력도 있다. 젊은 시절 부모님은 다른 사람 같으면 평생 해야 이룰 일을 다 이루셨다.

그리고 두 분은 이스라엘로 와서 모든 걸 새로 시작했다.

굳이 따지자면, 어머니가 먼저 오셨다. 아버지보다 거의 10년 먼저. 어머니는 예루살렘의 한 아파트에 살면서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하셨다. 중동 남성들의 홍수 속에 싱글인 금발의 프리티 우먼으로 사신 것이다. 어머니가 만만하게 찝적댈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아마 1~2분이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최소한 만나서 2분은 견디셔야 했다.

어머니는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구리온, (현대 히브리어의 아버지 엘리에제르 벤예후다의 아들) 에후드 벤예후다 등 이제 모두가 글로나 읽을 수 있는 유명인들을 다 만나셨다. 심지어 당신이 만든 영화 <마른 뼈들>을 이스라엘 최초의 여성 총리 골다 메이르에게 보여줄 기회도 있었다. 그 영화는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에 대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물리적, 영적 회복의 이야기를 짚으며 많은 성경 구절들을 보여준다. 영화의 결론 부분에서 골다는 어머니에게 질문했다. “영화 속의 어떤 구절들이 타나흐(구약)의 것이고 어떤 구절들이 기독교의 신약에서 나온 것인가요?” 어머니는 대답했다. “모든 구절들이 타나흐에서 나온 거에요.”

수년 동안 이스라엘 땅 전역을 살펴봤지만 어머니는 불과 십여 명의 유대인 밖에 못 찾으셨다. 그러나 미국에서 “예수 운동”이 산불처럼 번져 많은 미국 유대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가운데, 어머니는 미국으로 돌아가 유대인 신자들에게 유수 생활을 그치고 고토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셨다. 그 부름에 응답한 사람 중 하나가 아버지였고, 1년 동안만 방문하겠다는 게 첫 조건이었다. 6개월이 지나고 두 분은 약혼을 하게 됐다.

두 분의 성장 배경은 극과 극이다. 어머니는 미국 전역을 은색 캠핑카를 타고 다니며 천막 집회를 여는 사역자 부모 밑에서 태어난 세 자녀 중 첫째로 자라셨다. 외할아버지 고든 린지, 외할머니 프레다 린지는 치유의 목소리(Voice of Healing)와 열방에 그리스도를(Christ for the Nations Institute)을 설립한 것으로 가장 유명한 분들이다.

 

0719 - Shira meets David Ben Gurion

다비드 벤 구리온 이스라엘 초대 총리와 대화하는 쉬라

0719 - Ari receives award

육상 분야에서 수상한 아리

 

반면 아버지는 두 살 때 여섯 형제자매들 및 부모님과 떨어졌다. 아버지는 유년기 내내 군대식의 기숙 학교에서 지냈다. 열두 살 때는 학교 캠퍼스를 떠나본 기억이 없다고 한다. 결국 대학교에 가서 명예롭게 졸업했고, 프로 스포츠 선수가 되었으며, 미군에서 복무했고 LA 보안관 대리로 일하기도 했다. 할리우드 감독을 만날 기회가 있어, 아버지는 TV 드라마에서 바로 그런 역할들을 연기하게 됐다. 주말에는 잭 헤이포드 목사님의 교회에 출석했고, 작은 메시아닉 유대인 회당도 섬겼다.

한 운명 같은 주말에 어머니는 잭 헤이포드 목사님의 교회에서 이스라엘에 관한 말씀을 전하게 됐고, 거기서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입은 노란 드레스가 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점점 더 좋아지기만 했다. 그게 4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우리 부모님은 텔아비브 북쪽의 아파트에 살다가, 어느 날 우편함에 2만 달러어치의 스위스 지폐와 함께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종 아리와 쉬라 씨께”라는 쪽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 돈으로 두 분은 더 큰 주택을 임대할 수 있었고, 거기서 가정 모임을 시작했다. 이후 텔아비브 근처 농지 한가운데  많은 땅을 사서 사역 센터와 집을 지으셨다. 두 분은 그 건물 지하에 이스라엘 최초의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를 개척하고자 하셨다. 그 지하 위에 있는 2층의 방에서 내가 자랐다.

어느 정도 생생한 가장 어렸을 적의 기억은 초등학교 때다. 2학년 선생님이 나를 교실 밖으로 데려나가 복도의 테이블에 앉히고, 내가 친구들에게 두 번 태어났다고 말했다는데 무슨 뜻인지 설명하라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현대 히브리어는 모두에게 새로운 언어였기 때문에, 영적인 것들을 소통할 용어들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거듭났다”는 개념을 쉽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0719 - Ari, Shira, Ayal, Shani in the desert

어린 자녀 아얄, 샤니와 이스라엘 광야에서 포즈를 취한 아리와 쉬라.

 

우리 마을은 보수적이면서 세속적이었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은 절기가 되면 회당에 들어찼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일반적 존중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안식일에 운전을 하거나 외계인을 믿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문제 없었다. 예슈아가 유대 민족에게 약속된 메시아라고 믿는 우리를 내 친구들을 그렇게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외계인처럼 뭔가 미친 것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우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우리 집은 항상 사람들로 가득했다. 금요일 저녁 “샤밭 만찬”은 항상 이 낯선 “새” 신앙에 관심 있는 새로운 사람이 참여했다. 기독교의 신 예슈아가 따지고 보면 유대인이고, 무한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에 들어오실 수 있다는 신앙 말이다.

그리고 그때는 밤새도록 머물고 간 사람도 있었다. 어느 때는 일주일, 또 몇 달씩 있기도 했다. 그들은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로 이민을 하려는데 머물 곳이 필요했고, 현지 시스템을 파악하고 나서야 스스로 발걸음을 떼는, 대부분이 미국에서 온 유대인들이었다. 부모님이 이 바닥에서 너무나 일찍부터 활동적이셨기 때문에, 나는 현재 이스라엘의 메시아닉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일어나는 거의 모두의 모든 일이 한 번쯤은 부모님의 도움으로 됐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 부모님은 싹을 틔우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닉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 될지 개척해나가느라 바쁘셨지만, 나는 이스라엘 토박이 메시아닉으로서 성장하는 중이라 바빴다. 우리 오빠도 이스라엘의 초기를 살면서 고통을 겪었는데, 공교육에서 오빠의 난독증과 ADHD를 지능이 낮은 것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었다. (그냥 참고로 말하자면 현재 오빠는 나노생명기술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0719 - Ramat Hasharon Congregation-1

초창기 아리와 쉬라가 텔아비브 근처에 개척한 공동체. 이스라엘 최초로 히브리어를 사용한 공동체 중 하나였다.

0719 - Ramat Hasharon Congregation 2

1980년대 말에 이르러 이 공동체는 사람들이 마당에 앉아야 할 정도로 가득 찼다.

 

1988년 여름, 우리 집 지하의 공동체는 텔아비브 지역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행사 중 하나가 되었다. 성장하고 있었고, 예배엔 사람들이 가득하여 지하를 채우고 마당까지 넘쳤다. 그러나 의사와 작가, 발명가 집안 출신의 부모님은 오빠의 학습 문제를 더 이상 방관할 수가 없었다. 가족을 우선시하여 공동체를 새로운 리더십에게 맡긴 뒤, 우리 가족은 오빠 문제에 대한 도움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그 시점까지 나는 히브리어로만 공부했었다. 나는 미국으로 넘어갔던 그 여름에 영어로 읽고 쓰는 법을 배워야 했다. 2개월 간 읽기와 쓰기 교육만 받고 4학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영어를 하면서 빨리 이스라엘 억양을 뗄 수 있었고, 곧 여느 미국인처럼 발음을 했다. 이것이 안 좋았던 이유는 미국 사람들이 내 발음을 듣고 자신들의 문화 규범을 더 잘 알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산 2년 동안 나는 “이걸 모르면 어떡해?”라는 말을 엄청 들었다. 학교 쉬는 시간 중 절반 가량은 담벼락에 기대 “모르면 안 되는” 범죄들을 저지르며 지냈던 것 같다. 그 중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걸프전 동안 사담 후세인이 텔아비브에 미사일 로비를 해서 약간 지연되었던, 오빠와 나의 바르 미쯔바와 바트 미쯔바 시기에 맞춰 우린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이후의 청소년기가 쉬웠다고 말할 순 없지만, 우린 생존했다.

나는 신학교에서 코비를 만났다. 2년 후 우린 결혼했고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0719 - Kobi and Ari at Sela's Brit

코비와 샤니의 첫 아들 생일을 축하하는 아리와 코비

0719 - Kobi preaching

1999년 샤니와 결혼하여 이스라엘로 이주한 코비는 유럽, 남북 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전해 왔다.

코비

코비는 시아버지(제이)가 달라스 신학교에서 박사 과정 중일 때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태어났다. 당시 가족들은 열방에 그리스도를 계통의 사람들과 전혀 얽히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시아버지는 나중에 돌아보며 자기 아들이 그 설립자의 손녀와 결혼하게 됐다는 게 정말 우습다고 생각했다.

코비의 가족은 유년기 대부분을 앨러배마주 셀마에서 보냈는데, 시아버지는 거기서 다인종 공동체를 처음으로 개척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코비는 그 덕에 미국 흑인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정을 품게 됐다.

코비는 고등학교 방과후 락밴드에서는 드럼을 쳤지만, 재즈 트럼펫을 불면서 대학교 시절을 보냈다. 코비가 신학교에 진학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 그의 밴드는 막 악명을 얻고 있었고 그의 건설 회사도 막 숨통이 트이던 때였다. 코비는 학비를 대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았다. 그 결정은 앨러배마의 뜨거운 태양 아래 지붕 타일과 바닥을 까는 사람에서 중동의 이글대는 태양 아래 사역하는 사람으로 운명을 바꿔놓았다.

모든 걸 생각해볼 때, 코비는 문화 적응을 잘 했다. 여성들이 드세고 매너라곤 거의 없는 이스라엘 문화는 미국 남부에서 자란 그에겐 극단의 변화였다.

이스라엘 현지인들은 금세 코비를 좋아하게 됐고, 남편은 공동체 리더십 직분을 공식적으로 맡고 있지 않지만, 어려운 상황의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와 조언을 구한다. 공동체 내에선 보통 여성들이 더 활동적이지만, 코비는 남성들이 아침 일찍 출근 전에 기도회로 모여 하나님을 찾도록 감동을 주었다. 또한 예배 후에도 남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신실한 팀을 꾸렸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사역의 경계를 넘어 일했기 때문에, 코비는 다른 사역 단체들로부터 프로젝트를 주도해 달라고 채용되는 일이 많았다.

0719 - Sorko-Ram family

걸프전이 끝나자마자 아얄과 샤니는 각각 바르 미쯔바와 바트 미쯔바를 공동 진행했다.

 

마오즈와 나

나는 유년기 전부를 마오즈 이스라엘과 얽혀 보냈다. 초반에 우리는 마오즈 이스라엘 리포트를 이스라엘에서 직접 우편 발송했다. 그래서 나는 소식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우편 발송하는 일을 도왔다. 사무실에 앉아 있기도 했고 사역 여행에 따라가기도 하고, 집회 때 춤을 추기도 했다. 나이가 더 들면서 그래픽을 돕기도 했고 공동체 예배 팀에서 노래를 하기도 했다.

마오즈는 항상 이스라엘인들을 전도하는 게 우선이었다. 부모님은 그 부분에 있어 완고하셨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을 찾는다면, 모임을 채우기가 쉬웠다. 왜냐하면 1~2년씩 방문하여 자원 봉사하기 위해 머무르는 사람들이 꾸준히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나고 돌아보면, 방문자들이 왔다갔을 때, 이스라엘 땅에 있는 현지인들에게는 영향력이 거의 없음을 본다. 그래서 내가 늘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바에 따라, 남편과 나는 우리만의 사역 단체 예슈아 이스라엘을 설립했고 이스라엘 현지인들에게 초점을 두는, 어렵지만 결국 열매 맺는 접근법을 취하기로 했다.

우리는 마오즈가 책 출판, 공동체 활동, 전국 연합 집회 등에 초점을 맞추던 2000년대 초반에 예슈아 이스라엘을 설립했다. 우리 부부는 이스라엘의 젊은 뮤지션들이 매주 예배 찬양이라는 틀 내에서, 또 그것을 벗어나 발전했으면 하는 부담이 크게 있었다. 우리 가정이 점차 커지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역하는지와 자녀들을 어떻게 훈육하는지를 나눠달라는 요청이 동시에 늘어갔다. 그래서 예슈아 이스라엘의 두 가지 주된 초점이 경배와 가정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예슈아 이스라엘을 설립하고 가장 좋았던 점은 이스라엘에 있어 우리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찾은 것이었음을 밝히고 싶다. 그들은 사역에 대한 우리의 정말 이스라엘스러운, 그래서 종종 날 것 같고 형식적이지 않은 접근법을 좋아하는 이들이었다.

우리는 거의 20년 동안 예슈아 이스라엘을 발전시켜 왔다. 작곡을 했고, 다른 이들이 곡을 쓰도록 그리고 우리가 발견한 수준 있는 음악을 녹음할 수 있도록 도왔다. 우리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있는 가족들을 도우며 시련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았다. 전국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났고, 물론 우리 아이들도 데리고 다녔다. 우리 부부는 둘이서 찾아갈 때보다 아이들이 갈 때 더 큰 영향력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아이들이 기도하고 선포할 때 성인들이 눈물을 흘린다. 치유와 불임 가정에 생명을 주신 간증들이 아이들이 기도하고 몇 달 만에 들려온다. 그중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가정을 위한 유산을 세워가는 비전을 붙들게 되는 것이다. 예슈아께서 지체하신다면 앞으로 여러 세대라도 이어갈 수 있는 유산을 말이다.

0719 - Ferguson family ministers 1

코비와 샤니는 아이들과 사역 여행을 다닐 때가 많다. 부부는 아이들에게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이스라엘 생활에 대한 관점을 나누도록 허락한다.

0719 - Ferguson family ministers 2

마오즈와 우리

수년이 지나면서 부모님이 이스라엘 전역의 너무나 많은 부분, 그리고 나아가 중동의 은밀한 곳들까지 영향을 미친 사역체를 세우신 걸 보게 됐고 나는 장래를 생각하게 됐다. 수백만 달러 규모의 국제 사역 단체들이 이스라엘에 와서 자신들의 브랜드를 세우려 열매도 없이 돈만 던져놓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현지 지체들의 도움과 전 세계 신자들의 기도 지원이 없는 이스라엘 사역은 장기적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1~2년만에 무너지고 만다.

우리 부부는 부모님이 성공과 함께 다가온 반대의 물결을 이겨내고 도전의 소용돌이를 버텨내시는 모습을 보아왔다. 부모님은 수십년간 단단하고 안정적인 것을 세우셨고, 그간의 노력이 앞으로도 수십년간 열매 맺기를 원한다.

솔직히 말해 우리 온 집안을 통틀어 은퇴라는 걸 한 사람이 없다. 우리 가족은 인생의 말년을 라운지 체어에 앉아 누리기엔 너무나 목적의식이 강한 유전자가 있다. 우리 할머니는 공식 은퇴하셨을 때 90대셨다. 현실적으로 그건 연금을 받아 살면서 자택 근무를 한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은퇴 후에도 소천하시기까지 책상에 책과 논문을 쌓아두고 계셨다.

그래도 성경은 사역하는 사람들은 젊은 세대 사역자들을 돕는 역할로 전환을 해야하는 때가 있다고 말씀한다 (민 8:24~26). 그리고 많은 기도와 배려, 마오즈 이스라엘의 리더십과 이사진, 예슈아 이스라엘의 이사진, 그리고 책임 협력인단의 만장일치로 우리 부부는 마오즈 이스라엘의 차기 리더십을 맡기로 했다. 이 과정 가운데 우리는 예슈아 이스라엘의 모든 활동과 팀원들을 마오즈 이스라엘 팀과 합병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여러분은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후원하는 더 큰 가족에 속하게 됐다는 의미다.

이 과정은 현재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모든 프로젝트들이 이전보다 더 빠르게 추진될 수 있는 상황이다. 아티스트 모임은 이제 현대 이스라엘 찬양의 발전 뿐 아니라 어린이들이의 보컬 훈련과 뮤지션으로서의 자질을 키워주는 마오즈 이스라엘의 어린이를 위한 음악 만들기 프로그램을 포함하게 된다. 우리가 진행하던 이스라엘 패밀리 이니셔티브는 IstandwithIsrael.com과 병합되어 아예 재정위원회를 꾸리게 되고, 어려운 가정과 개인들을 찾아 더 잘 도울 수 있는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게 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찬양을 계속해서 계발할 것이며, 가능한 한 많은 곳을 다니며 가족으로서 함께 사역할 것이다.

마오즈 이스라엘/예슈아 이스라엘 팀엔 이제 16명의 이스라엘인으로 구성된 임직원과 아일랜드, 캐나다, 독일, 영국, 브라질, 미국 6개 지부의 임직원을 포함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여러분과 마오즈 이스라엘로서 소통을 이어갈 것이다. 여러분과 우리가 소중히 여겨온 것들에 계속해서 많은 참여를 해갈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안심해도 된다.

우리의 장막은 커지고 있으며 우리는 여러분과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향한 이 모험 가운데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고대한다!

0719 - Lahav Bat Mitzvah

아리와 쉬라 부부-예루살렘 산지에서. 코비와 샤니는 둘째 딸 라하브의 바트 미쯔바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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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 고원 2부 욤키푸르 전쟁의 기적

0719 - Israeli tanks on the Golan Heights

Photo: Gettyimages/David Rubinger

0719 - Zvi Greengold21세의 즈비카 그린골드 중위는 휴가차 갈릴리 서부에 위치한 자신의 키부츠에 있었다. 연중 가장 거룩한 날인 욤 키푸르를 지키며 고요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때는 1973년 10월 6일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군인들이 휴가 중이었다.

갑자기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키부츠 위로 하늘을 가르고 예상치 못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을 들었다. 연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욤키푸르에 연습을 하진 않기 때문이었다.

두 번에 걸친 기습 공격으로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넘어섰고 이스라엘 남부로 향하고 있었다. 시리아 탱크는 이스라엘 통제 하의 골란 고원을 너머 들어오고 있었는데, 갈릴리를 정복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즈비카는 아직 부대 배치가 안 돼어 히치하이킹을 하고 약 120km를 가서 골란 고원의 나파흐 기지에 도착했다. 실망스럽게도 그는 부상자를 돌보는 것 외엔 별로 할 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작동되는 군사 장비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지는 이미 부상 당한 병사들로 거의 가득찬 상태였다. 부상자들을 도우면서 즈비카는 두 대의 심각하게 훼손된 IDF 센추리온 탱크가 기지 구석에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여단 본부에 무전을 해 “탱크 병력(따지고 보면 맞다)”이 있다며 침략해온 시리아군에 맞서 전투를 하도록 허가를 요청했다. 그는 두 대의 탱크 수리를 도와, 몇 안 되는 병력을 모아 밤중에 탱크로 출동했다. 곧 그는 20m 앞에 있는 시리아 탱크를 마주해 발포를 했고, 그 탱크는 불타올랐다.

탱크 고장

자신이 공격한 데에서 받은 충격으로 센츄리온 탱크가 고장났다. 즈비카는 부대원 한 명을 태워 기지로 보내고, 두 번째 탱크를 조종했다. 홀로 즈비카는 전진했고, 충격적이게도 지평선에 무수히 많은 차 불빛이 있는 것을 보았다.

시리아 탱크와 트럭 부대가 아무런 저지 없이 즈비카의 기지로 향해오고 있었다. 시리아는 러시아가 지원한 1400대의 탱크 중 첫 600대와 1천 대의 대포로 공격을 시작했다. 즈비카는 사령관에게 무전을 했고, 그는 이렇게 물었다. “너희는 몇 명인가?”

그러나 즈비카는 시리아 측에서 듣고 있을 것이기에 자신이 혼자라고 말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냥 이랬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숫자는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즈비카의 사령관은 “즈비카 병력”에 몇 명의 병사와 탱크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즈비카는 혼자였다. 그의 탱크는 심하게 망가졌고, 그는 어둠 속에 숨어 급히 후진한 뒤 측면 기둥을 따라가다가 아주 근접한 거리에서 발포를 하고 적의 포탄을 피했다. 많은 이스라엘 탱크들이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시리아를 속인 것이었다. 그는 적의 탱크 열 대를 더 파괴했고, 그제야 시리아는 철군하기 시작했다.

즈비카 소대

이후 20시간 동안, 그린골드 중위는 싸웠다. 때로는 홀로, 때로는 다른 탱크들과 함께. 모든 전선을 넘나들며 접전을 벌였다. 홀로 남겨졌을 때 그는 운전병에게 계속 명령을 내리며, 산악 지대를 거칠게 오르내리면서 계속 발포를 했고 그 다음으론 자신에게 소대가 있거나 탱크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지그재그로 운행했다.

수적으로 막대하게 밀린다는 것 외에 이스라엘의 최대 과제는 소련이 제공한 시리아의 최신 야간 투시 장비였다. 이스라엘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 시점에 즈비카는 다른 10대의 이스라엘 탱크와 만났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금세 폭파되었고, 즈비카의 탱크와 군복에도 불이 붙었다. 그는 탱크에서 머리부터 뛰어내렸고, 뒤이어 그의 사수가 나왔다. 운전병은 사망했다.

그는 버려진 또 다른 탱크를 붙잡아 타고 13대로 이뤄진 부대에 꼈다. 그들은 100대의 탱크와 40대의 병력 수송 장갑차로 구성된 시리아의 무장 병력을 용케 막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작은 탱크 부대가 임시방편으로 클로즈업 차단 작업을 한 것은 시리아가 골란 고원 전체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수 있는 전술이었다. (http://bit.ly/zvikagreengold)

0719 - destroyed Israeli tank

이스라엘 탱크 한 대가 파괴되었다. 이스라엘은 1973년 전쟁 중 골란 고원과 시나이 사막에서 천 대 가량의 탱크를 잃었다.

“우린 돌아설 곳이 없다”

몇 년 후, 즈비카는 13대의 탱크와 있던 그 순간이 유대 민족이 궁지에 몰렸음을 깨달은 더 큰 깨달음의 한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http://bit.ly/yomkippurwargolanheights)  “우리에겐 다른 선택권이 없었어요. 다른 갈 곳이 없었죠.” 즈비카는 계속 싸우며 병력 보충을 기다렸다. 실탄과 연료가 위험할 정도로 낮은 상태였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략적 나파흐 기지가 공격을 받자, 즈비카는 자신의 탱크를 결정적 순간에 중대한 지점으로 옮겼다.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의 탱크엔 또 다시 불이 붙었고 그는 다른 탱크로 갈아탈 수 밖에 없었다. 기지 방어를 하면서 한 이스라엘 탱크 사령관은 본부에 무전을 했다. “장애물을 따라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 탱크 한 대 말고는 캠프 내에 아무도 없다.”

마침내 IDF 예비군 탱크 부대가 즈비카의 위치로 와서 병력 보충을 해주기까지 즈비카는 침략을 계속 저지할 수 있었다. 때로 그는 이런 마음이었다. “그냥 진작에 날 쏘지!”  (http://bit.ly/arabisraeliconflictsyria)  즈비카는 이후 언론에 이렇게 전했다. “난 죽는 게 무섭지 않았어요. 실패하는 게 무서웠죠.” 물론 이스라엘이 시리아군에 짓밟히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는 시리아 탱크를 계속 공격하며 그들이 자신의 기지를 점령하지 못하게 하려 최선을 다했다. 그는 약 대여섯 번 탱크를 갈아탔다.

나파흐 공격으로부터 퇴각한 시리아

추가 병력이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무전 지시가 모든 IDF 부대에 전해졌다. 나파흐 근처의 시리아 병력을 몰아쳐서 침략으로부터 기지를 구하라는 것이었다. 곧 시리아는 여러 방향에서 공격을 받게 됐다. 그들은 이것을 매복 공격으로 해석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골란 고원이 결정되었다고 즈비카는 강조했다.

소강 상태 가운데 즈비카는 고통스러운 몸을 이끌고 탱크에서 내려, 화상과 부상, 그을음이 묻은 부위를 감쌌다. 탈진한 그는 쓰러졌고 30시간 내내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전투를 치른 끝에 병원으로 수송되었다.

그러나 나파흐 기지는 한 번도 적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 즈비카의 노력은 이스라엘 북부의 상황을 지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즈비카 그린골드는 이스라엘 무공 훈장을 받았다. 이스라엘 국가에서 주는 최고의 영예였다. 개인적으로 그는 60대가 넘는 탱크를 파괴한 공로를 인정 받았다. 현재도 살아있는 그는 이스라엘 전선에 있는 모든 병사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역사 학자들: 즈비카 병력은 대단히 중요

이스라엘의 역사학자들은 즈비카 그린골드 중위가 욤키푸르 전쟁 초반에 골란 고원에서 보여준 행동은 작전의 성공에 중대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1대에서 16대 사이의 탱크로 구성된 그의 작은 병력이 시리아가 타플라인 길로 전진해오지 못하도록 막고 침략하는 것을 중단시키기를 IDF의 상당한 추가 병력이 전선에 도달해 전투에 함께하기까지 버텨줬다.

그의 게릴라 스타일 전술과 높은 살상률은 시리아 사령관들로 하여금 훨씬 큰 탱크 부대와 싸우고 있는 것이라 믿게 만들었다. 즈비카 병력이 많은 경우 불과 한두 대의 센츄리온 탱크로 시리아 장갑 사단 5개를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0719 - destroyed Israeli tank

시리아 병력 수송 장갑차 라인이 보이는 모든 것을 다 파괴했다. 10월 24일에 이르러, IDF는 서부 골란을 다시 찾았고, 다마스쿠스 외곽을 포격하고 있었다. UN은 즉각 휴전 협정을 요구해 이뤄냈다.
Photo: Magnumphotos / Bruno Barbey

큰 값을 치르고 구한 이스라엘

그러나 약 170대의 탱크와 70대의 대포로 구성된 그의 여단 전체는 불가능한 역경을 딛고 계속 버팀으로 몇 시간 후에 스스로를 희생했다. 188 여단은 없어졌고 그 사령관은 죽임 당했다.

즈비카는 말했다. “죽은 사람도 있고 산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일들을 그들이 했다. 전선의 그들은 특출한 일을 해냈고 그들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의 임무에 완전히 헌신된 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역량을 보면 매번 놀랍기만 하다. 그는 다윗 왕의 “강한 용사들”의 후예였을지 모른다!

하늘의 뜻

하지만 진정 이스라엘에 승리가 임하기까지 전쟁 중엔 많은 기적이 있었다. 골란 고원의 눈물 골짜기라고 불리는 곳에선 100대가 안 되는 센츄리온 탱크가 500대가 넘는 시리아 탱크와 맞섰다. 넷째 날에 이스라엘은 150대의 적의 탱크에 맞서는 탱크가 3대 뿐이었다. 갑자기 시리아 병력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돌아섰고, 시리아로 향했다. 모사드가 시리아 육군 9사단의 사령관을 심문하기까지 “왜”가 미스테리였다.

왜 그 마지막 세 대의 탱크를 제거하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모사드 심문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사일 라인에 수많은 흰 천사들이 딱 서 있는 것을 보고 하늘의 흰 손이 당장 거기 서서 꼼짝 말라고 하는 음성을 듣고서도 당신들이 시리아의 미사일 라인을 넘을 수 있는지 보고 싶군요. 당연히 나는 거기 당장 멈췄습니다.” 사령관은 말했다.  (http://bit.ly/yomkippurwarmiracle)

어쩌면 이 무슬림 사령관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공포스러운 전쟁 가운데 2,656명의 이스라엘 군사가 전사했다. 또 9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100대가 넘는 이스라엘 비행기가 격추됐다. 즈비카와 함께 7명의 병사들이 무공 훈장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골란 고원을 돌려주셨다.

그런데 그 값은 얼마나 큰 것이었던지!

하지만 (평화를 만드는 위대한 기관이라는) UN의 회원국들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에 골란 고원을 시리아에 돌려줄 것을 주장한다! 그러니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만 빼고 모두가 말이다! 물론 하나님도 함께 계신다.

골란 고원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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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대회에 나간 마오즈의 음악 학생들

0719 - Tanya and girls

Tanya and our contestants

사랑하는 마오즈 이스라엘 동역자 여러분께,

2019년 4월 2~3일, 아주 중요한 문화 행사가 이스라엘에서 열렸습니다. 위대한 유대인 테너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를 추모하는 제4회 국제 보컬 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이 대회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유능한 젊은이들을 찾아 후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리투아니아, 러시아, 독일의 유명 가수와 작곡가들을 포함하는 전문 심사위원단이 공연을 평가했습니다.

양일 간의 대회 중에 133명의 보컬리스트들이 전 세계에서 와서 클래식, 포크, 팝 스타일의 공연을 보여줬습니다. 그 중 가장 어린 참가자는 5세였고, 연장자는 25세였습니다.

젊은 뮤지션들을 계발하기 위한 마오즈 이스라엘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세 명의 어린이가 대회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했습니다. 모두 10세인 오렌, 나탈리아, 스테파니였습니다.

저희는 참가자 3명이 모두 각 분야에서 명예 수상을 해서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대회 둘째 날엔 상위 30명의 갈라 콘서트 공연이 있었는데, 마오즈의 3명 모두 숙련된 보컬과 예술적 기질을 자랑하며 탁월한 공연을 했습니다.

저희는 이 어린 예술가들을 축하하길 원하며, 또한 “어린이를 위한 음악 만들기” 프로그램의 모든 후원자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이스라엘의 예배자들이 다시 일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음악 만들기 프로그램 대표

타냐 카딘

0719 - Music Making For Kids 2

0719 - Music Making For Kids 3

 

어린이를 위한 음악 만들기는 아티스트 모임이 이스라엘의 이스라엘스러운 경배와 찬양을 키우고 개발해가는 여러 방법 중 하나입니다. 저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예배의 민족이자 전 세계 예배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부르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아티스트 모임은 아래 사역을 감당한다.

훈련

유능한 젊은이들이 기술을 연마할 수 있도록 장학금과 튜터링 제공

0719 - Fellowship Of Artists - training

멘토

영적 성숙과 인격 면에서 자라갈 수 있도록 교제하며 제자 훈련

0719 - Fellowship Of Artists - mentoring

 

기회

이스라엘과 해외에서 스튜디오 녹음 및 사역 기회 제공

0719 - Fellowship of Artists - opport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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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사랑하는 마오즈 동역자 분들께,

사람들은 음악이 단순한 말의 능력을 넘어서 소통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보편적 언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정통파와 세속인-이 저희에게 저희의 이스라엘 찬양을 들은 소감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습니다. “설명이 안 돼요.” 이렇게 말합니다. “가사의 모든 내용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놀라운 임재가 느껴졌어요.”

길거리에서 말로 하면 거절 당할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아름다운 멜로디에 얹어 전하면 열정적으로 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음악은 이스라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나, 이스라엘 땅을 진정한 경배의 소리로 채우는 일 모두에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음악인들은 태어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들이 태어난 목적에 합당한 훈련과 양육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가능한 최고의 예배 음악을 만들고자 하는 비전을 좇습니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찾아 훈련시키는 것이죠. 저희는 1년에 몇 차례씩 각 어린이를 시험하고 진전 상황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매년 “어린이를 위한 음악 만들기”가 제공하는 장학금을 위해 경쟁합니다.

지난 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훈련을 지속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 60명의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내년에는 한 아이도 탈락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이들은 보컬 훈련을 받고, 첼로부터 색소폰, 기타, 드럼까지 다양한 악기를 공부합니다.

100달러면 한 아이가 한 달간 공부하는 비용을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천 달러면 1년을 후원하시는 겁니다.

몇 년 내에 이 아이들은 전국의 예배 팀에 필요한 자리들을 충분히 채울 준비가 될 것이고, 이스라엘만의 찬양곡들을 쓸 수 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올해 마오즈의 “어린이를 위한 음악 만들기” 프로그램을 통해 뮤지션 한 명을 후원하심으로 이스라엘이 복음을 듣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시온을 위하여,

아리, 쉬라, 코비와 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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